도시개발연구포럼 > 새로운논문및칼럼 > [칼럼]성냥갑 아파트 디자인(노동성)

얼마 전 중국은 이안 감독의 영화 ‘색·계’(2007)가 "민족 반역자를 미화하고 애국지사를 모욕했다"면서 영화의 여주인공인 팅웨이에게 중국내 방영되는 영화나 TV 출연 금지와 입국 불허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중국에서 30여분이 삭제돼 개봉한 영화 ‘색·계’는 지난해 11월 우리나라와 홍콩 등지에서 무삭제판이 개봉돼 상당한 흥행에 성공했으며,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또한 여주인공 팅웨이는 중국 언론이 선정한 2007년을 빛낸 여배우 1위에 선정됐으며 화장품광고 전속계약으로 약 8억원의 출연료를 받는 스타가 됐다.
우리나라도 영화 검열의 한 예로 고 신상옥 감독은 그의 저서 ‘난 영화였다’에서 자신이 20년간 운영한 ‘신필름’ 영화사가 사전 검열에서 삭제토록 한 약 10초간의 키스신을 예고편에 방영했다는 이유로 영업허가 취소를 당해 당시 상근직원 200여명 규모 회사가 하루아침에 문을 닫았다고 서술했다. 이 영화가 바로 홍콩과 합작해 만든 ‘장미와 들개’(1975)이다.
영화 검열과 마찬가지로 전문가들의 판단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는 사례를 보여준 적이 있는데, 1990년대 초 MBC에서 방영된 ‘TV특종연예'라는 프로그램에서다. 당시 신인들이 출연해 자신의 장기를 선보이고 이를 평가받는 코너가 있었는데 작곡가와 작사가·연예평론가·인기가수들로 구성된 심사위원은 1992년 4월 11일 출연한 세 명의 청년에 대해 ‘괴상한 춤을 추고 요상한 노래를 불렀다’, ‘리듬은 좋지만 멜로디 라인이 약하다’, ‘춤에 치중해 노래가 묻혔다.’ 등 좋지 않은 평가를 내렸다. 그러나 그 세 명의 청년들이 바로 서태지와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혹평에도 불구, 데뷔곡 ‘난 알아요’를 17주 연속 1위에 올리는 등 한국 가요계의 판도를 바꿔 버렸다.
전문가 판단의 함정 즉, 고무줄 심의 기준 논란은 건축디자인분야에서는 더욱 심각하다. 그 한 예로 서울시는 지난 2006년에 5월 서울시 새청사안을 국제 현상설계 공모를 통해 가장 현대적이고 서울시를 상징할 수 있다고 하는 ‘항아리형’ 디자인을 전문가인 교수 등으로 구성된 선정위원회에서 심의를 통해 결정하고 의욕적으로 사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또 다른 교수 등으로 구성된 고건축 전문가 그룹인 문화재심의위원회는 이 안은 덕수궁과 환구단 등 문화재와 부조화를 이룬다는 이유로 부결하고, 같은 해 10월 태극모양, 11월 변형 태극형태의 디자인도 같은 이유로 심의위원회에서 통과시키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현상설계에 당선된 건축설계자는 심의 통과를 목표로 자신의 의견을 접고 지난 2007년 10월에 심의위원들의 의견을 반영한 가장 무난한 성냥갑모양의 디자인을 제출해 조건부로 겨우 통과 했다. 의욕적으로 세계의 관광명소로 만들겠다던 설계안은 결국 전문가들의 심의를 통과하기 위해 5번째 안에서 네모반듯한 성냥갑 형태로 전락한 것이다. 이후 2007년 2월 서울시가 6번째 디자인을 발표하면서는 문화재심의위원들과 정치적인 협상(?)력을 발휘했는지 심의위원들의 양보를 받아 냈다고 발표했다.
우리 행정의 중심인 서울시에서 추진한 서울시청사 디자인에 대해서조차 여러 개의 심의 중 단지 한 단계에 지나지 않는 문화재심의 과정에서 6번의 설계변경과 1년 6개월의 시간 소요, 약 50여억 원의 예산 낭비가 있었다. 막강한 힘을 가진 서울시에서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에 대한 심의도 이러할 진데, 힘 없는 일반 서민들이 교통영향평가심의, 환경영향평가심의, 문화재심의, 경관심의, 건축심의, 도시계획심의 등을 거치면 결과적으로 디자인은 당연 성냥갑 형태가 될 것은 뻔한 일이다. 내가 존경하는 스승인 안영배 교수님이 “심의에서는 잘못된 부분만을 지적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적을 덜 받으려면 가장 무난한 설계 형태인 성냥갑 디자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얼마전 서울시가 아파트 사업승인시 심의를 강화해 멋진 디자인이 아니면 허가를 내주지 않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강화된 심의를 성냥갑이 아닌 독창적인 디자인이 과연 그 까다로운 심의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까? 새청사문제로 혹독한 심의 과정을 겪어본 서울시에서 발표한 내용이기에 더욱 의아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