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는 실존의 현장이다. 인간은 공간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장소는 인간의 주관적 체험과 감성의 작용에 의하여 특정장소의 기억과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이것은 장소감으로 지칭된다. 인간은 장소와의 깊은 연계감을 통해 장소에 대한 애정을 갖게 되고 이러한 애정이야말로 인간의 정체성 형성에 있어서도 주요한 몫을 차지하게 된다.

최근 들어 도시화의 급진전과 도시개발 사업의 광범위한 진행은 인간에게 필수적인 자신들만의 장소를 박탈하고, 현실세계에서 추방해 효율성과 기능성만을 강조하고 있다. 전 국토는 고유의 장소성을 상실하고 획일성과 동일성이라는 개발논리만 남아있다. 추억과 동심의 현장인 장소의 특징적인 요소를 부주의하고 무책임하게 없애버리는 장소 훼손이 빈번이 일어난다.

인간이 지닌 가치관과 감성, 느낌과 기억은 화폐로 측정할 수 없는 무한의 가치와 의미가 있음을 무시하는 과거의 개발논리는 이제 곳곳에서 저항과 반발을 불러온다. 특히 도시재개발 사업은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장소와의 유대를 상실하게하고 현행의 보상체계만으로 장소에 대한 박탈감을 회복시키기란 불가능하다. 이주단지의 물리적 조건이 아무리 우수하다고 하여도 이주민의 내면에 존재하는 장소감과 애착을 완벽하게 충족시킨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기대이다. 인간의 주관적인 경험과 추억까지도 복원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장소훼손과 획일화 현상은 대기업과 중앙정치 권력에 의해 주로 자행되지만, 범국가적 장소와 장소성에 대한 몰이해와 무지야말로 시대의 추세로 자리 잡고 있어 이러한 흐름을 저지하고 타파하는 것이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될 것이다.

노스탤지어(향수병)는 인간과 장소와의 밀접함을 보여준다. 노스텔지어는 집과 집이 있는 장소에 대한 그리움이 도를 넘어 정신적, 신체적 이상증상까지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불안감, 불면증, 식욕감퇴 등은 향수병의 대표적인 증세로서 과거에는 향수병이 심해지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본질상 장소가 주는 안정감은 인간 활동의 원천이 되며 지속적으로 인간의 내재된 본성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장소감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무장소의 도래를 어떠한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지는 고민이다.

도시개발 사업시행시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될 사항은 지역의 특성을 결정하는 역사문화적 유물과 자연적 요소의 보존을 통해 도시의 장소적 정체성을 유지시키고 인간이 가진 장소감을 훼손시키지 않는 것이다. 강과 하천, 구릉과 산맥, 오랜 세월을 제자리에서 존재하고 있는 조형물과 건축물 등은 인간의 기억을 재생시키며 안정적인 상태로 존재하게 한다. 이윤창출의 극대화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일도 할 수 있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논리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이며 인간 삶의 목표와 지향점이 될 수 없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존재를 무언가와 연계시켜 얻는 소속감이고 이러한 소속감의 원천은 장소감에 있다. 장소에 대한 소속감은 현대에 들어 줄어드는 것처럼 보이나 여전히 인간형성과 실존의 근원으로서 존재한다. 장소를 훼손하고 장소감을 박탈하는 도시개발사업은 인간의 본성을 지키고 평안과 안정을 추구하도록 방법과 절차를 바꿔야만 한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어릴적 느꼈던 고향산천의 정다운 모습은 골격만이라도 간직해야 한다. 이것이 장소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이다.

 

 

향수                                             정지용     넓은 벌 동쪽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