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도직입적으로 “조합 돈에 눈이 있습니까, 없습니까?”라고 물으면 상대방은 어리둥절할 것이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릴 하냐고 반문하기 십상이다.
예전에는 (정비)조합 돈에 눈이 없었다. ‘조합 돈은 눈먼 돈’이라는 것이 상식이었다. 사흘이 멀다 하고 신문에서 대서특필하고 방송에서는 모 조합장이 리베이트를 수 억원 받았다는 둥 모 조합장이 조합 돈을 수 십억원 횡령했다는 둥 시끄러웠다.
그러나 이제는 조합 돈이 눈을 떴다. 심봉사처럼.
도시정비법 상의 규정이 점점 엄격해지고 체계를 갖춰가고 있기 때문이다. 조합의 돈은 점차 투명한 용기에 보관될 수밖에 없다. 불과 수 년 전만해도 조합 돈을 속이 전혀 보이지 않는 용기 속에 보관했는데 이제는 유리상자속에 보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최근에 조합의 돈을 총회결의 없이 사용해 조합 임원이 형사처벌 받는 하급심 판결례가 속출하고 있다.
갑(甲)은 서울시내 어느 마을 200여 필지를 대상으로 한 재건축 정비사업조합의 조합장이고 을(乙)은 모 정비사업전문관리업체의 대표다. 갑과 을은 2005년 말경 위 마을의 재건축 정비사업 구역지정변경을 위한 대관업무 수행 및 지원과 관련해 1차 업무용역 계약을 체결했다. 그런데 갑과 을은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인 2008년 초경 재건축 임대주택 공급비율 조정업무, 임대주택 축소로 인한 정비구역 변경 관련업무, 정비구역 변경에 관련한 건축심의 등에 필요한 도서작성 업무 등을 위탁하면서 총회가 아닌 대의원회의 결의를 거쳐 다시 제2차 업무용역 계약을 체결했다.
용역대금은 재건축 임대주택 공급비율 축소로 발생되는 조합수익금 총액의 8%로 정하고 계약금 명목으로 4400만원, 중도금 명목으로 4400만원, 잔금 명목으로 7억여원 합계 8억여원을 지급했다.
검찰에서는 갑과 을을 업무상배임죄 및 도시정비법위반죄로 의율해 재판에 회부했다. 혐의 내용은 1차 계약에 따라 갑과 을은 조합을 위해 구역지정(변경)을 위한 대관업무 수행 및 지원업무 등을 행함에 있어 제1차 계약 내용을 성실히 이행하고 도시정비법등 관계법령을 준수하면서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로 위임사무를 처리함으로써 조합원들의 재산상 손해를 방지해야 함에도 총회의 의결을 거치지 않고 적절한 용역비를 산정하는 절차 없이 수의계약으로 2차 업무용역 계약을 체결 후 8억여원을 지급해 조합에 재산상 손해를 가했다는 점이다.
갑과 을은 재판 과정에서 몇 가지 주장을 했다. 1차 계약과 2차 계약은 그 업무범위가 중복되지 않고, 가사 총회의 결의를 거치지는 않았지만 총회에서 대의원회에 권한을 위임하고 그 위임에 따라 대의원회 결의를 거쳤으며, 2차 계약 체결 후 을의 노력으로 임대주택 공급비율이 축소됨에 따라 조합원들에게 발생한 막대한 이익 중 일부를 용역대금으로 지급했기에 조합원의 부담이 될 계약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취지다.
법원에서는 갑과 을의 주장에 대해 쟁점별로 답하고 있다.
제2차 계약에 따라 조합은 일정한 채무를 부담하게 되고 이러한 채무는 결국 조합원들에게 부담이 된다. 재건축 임대주택 공급비율 축소가 조합원들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 가능성이 있고 계약대금 역시 앞으로 발생할 이익 중 일정한 비율을 계산해 지급하기로 약정했더라도 조합비로 2차 용역대가를 지급하기로 했다면 조합원들이 일정한 부담을 안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또한 인·허가, 설계변경 등을 위해 조합의 사업비 항목 중 기타 예비비로 수 십억원이 배정돼 있지만 제2차 계약은 조합의 일정한 업무를 제3자에게 위탁하고 제3자에게 그 대가를 지급하기로 하는 계약으로 단순히 행정청 관련 인허가 비용이라고 할 수 없어 기타 예비비 항목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 답변 요지다.
더 나아가 조합정관 및 도정법상의 규정에 의하면 조합원의 부담이 될 계약체결과 관련해서는 조합 총회의 의결을 받아야 하고, 이를 대의원회가 대항할 수도 없다.
그 이유는 재건축사업을 위해 필요한 계약이라 해도 조합원 각 개인에게 부담이 되는 계약에 대해서는 조합원 총회에서 계약내용을 충분히 심의하도록 함으로써 조합원들의 총의를 존중하고자 하는 취지에 비춰 예산으로 정한 사항의 해석은 엄격해야 한다는 입장에서다.
한편 정비업자인 을이 갑과 함께 책임져야 하는 이유를 본다. 을은 1차 계약에 따라 재건축 사업을 위한 제반사항, 특히 구역지정 변경과 관련해서도 전반적 자문과 아울러 대관업무 및 지원업무 등을 수행하는 지위에 있었고, 총회 책자 작성업무도 대행하고 있어 총회에서 임대주택 공급비율 축소에 대해 논의가 없었다는 사정을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2차 계약 체결 전 계약의 부당성 및 조합 총회를 거치지 않았음을 지적하는 소식지가 배포된 바 있음을 중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조합 돈이 눈을 뜨게 된 배경이다.